단식에 들며-지율스님

2003년 2월 23일 | 활동소식





어떤 사람은 현대문명이 달려가는 것을 대자연의 임종식을 지켜보는 것 같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옷고름을 풀어 헤친 누이를 보는 것 같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국토를 바라보는 일이 가족을 잃는 슬픔과 순결을 잃어버린 어린 누이를 보는 것처럼 느끼는 것보다 더 큰 슬픔과 안타까움은 없을 것입니다.
처음 고속철도가 천성산의 심장부를 관통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저는 산이 울고 있다고 느꼈으며, 늪가의 아주 작은 벌레와 이름모를 꽃들, 숲을 지키는 새와 노루·고라니에게 산의 생명들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날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많은 날들을 거리와 행사장에 서서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며, 우리 주위에서 사라져 버린 많은 생명들에게 참회하는 기분으로 천성산을 바라보고, 천성산의 문제를 풀고자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국토순례와 범시민대회, 삼보일배, 신부님·수녀님들의 거리 미사와 음악회, 토론회, 자전거 투어, 일인 시위 등의 행사를 했습니다. 그 뜻이 모여 지난달 28일에는 부산·경남의 학계, 종교계, 언론계, 사회단체 등 대표자들이 모여 경부고속철도 금정산·천성산 관통백지화를 위한 1000인 선언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안타깝게도 우리의 환경문제는 선거 때마다 이용당할 뿐, 선거후엔 무시되고 버려지고 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금정산·천성산 고속철도 관통 백지화를 가장 중요한 환경문제의 현안으로 새 정부의 공약으로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통령 인수위원회는 한국고속철도공단의 천성산 발주(2월 6일)를 묵과하고 있으며, 이에 힘입어 건교부와 고속철도공단은 공사를 강행하고 있습니다.
천성산 문제의 중심은 심각한 환경재앙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닫혀 있고, 굳어 있는 무책임한 정부와 관료사회의 변화를 기대한다는 것입니다.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이라는 문제를 통해 환경문제를 이 시대의 중요한 사회문제로 안고, 그 대답을 찾아야 하는 시점에 있으며, 그에 대한 답은 시대적 성찰로서 지금의 우리 세대뿐만이 아니라, 미래세대를 위한 지혜와 통찰로 풀어나가야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천성산 고속철도 관통 반대를 위한 단식은 우리의 염원을 담은 반성과 성찰이며, 말없는 산에게 도와주겠다고 했던 처음의 약속을 잊지 않기 위한 마음의 기도입니다.
저의 염원과 기도가 헛되지 않도록 많은 시민들의 동참과 관계자들의 자성으로 경부고속철도 금정산·천성산 관통이 백지화되고, 새로운 노선이 결정되기를 기원합니다.